경계하여 지켜야하는, 파수꾼(Bleak Night, 2011) (영화 파수꾼 리뷰 해석)

지금은 탑클래스 배우가 된 이제훈, 박정민 주연의 청소년, 학교 영화다. 영화 <동주>(2016)를 보기 전에 봤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박정민이 누구인지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남중 남고를 나온 남자들이 보면 더욱 몰입이 잘 될지도 모르지만 그냥 모든 청소년기를 보냈던 평범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 제목을 왜 그렇게 정했는지 한참 고민해야 했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영화 파수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부재
이 영화에서 중요한 세 인물 바로 기태(이제훈 분)와 동윤(서준영 분), 그리고 희준(박정민 분)이다. 그리고 극중에서 이들은 모두 청소년이자 학생이다.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했고, 자신의 상처를 보듬거나 마주할 힘이 아직 부족하다. 그래서 서로가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처를 들쑤시는 친구의 행동과 말에 오해를 풀지 못한다. 그 때는 그랬다. 내 친구가 다른 친구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괜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 아닌지, 둘이서만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거지? 궁금해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사람은 유아기나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특히 더욱 심리적 지지가 중요해진다. 내 편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안정적이다고 느낀다. 그런 면에서 기태는 부모님의 지지가 없었다. 어머니는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기태에게 관심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태는 또래 친구들의 인정으로 그것을 대체하려고 한다. 그것이 이 모든 비극의 발단이었다.
#2. 기태와 동윤
하지만 중학교 시절, 동윤은 기태를 이해하고 인정해 준 유일한 친구였다. 그래서 동윤의 살인선고나 다름없는 마지막 말을 듣고 심리적 지지를 상실하고 만 기태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동윤에게는 세 친구의 우정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 세정과의 사랑이었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우정이 사랑을 침범한다고 생각이 들자 조금씩 오해가 쌓이기 시작했다. 서로 자존심을 조금만 내려놓고 대화를 조금만 했더라면 쉽게 풀렸을 오해지만 그들에게는 여유와 지혜가 없다. 그래도 동윤이 기태에게 조금만 더 손을 내밀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건 사실이다. 아마 동윤의 무의식 중에 기태가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라는 낙인이 있었을 것이다. 기태와 희준의 관계가 틀어진 걸 알았을 때도 모든 자초지종을 모르면서도 희준의 편을 들었다는 점을 보면 말이다. 아마 동윤의 곁에도 친구가 많지 않은 걸 보면 유일하게 동윤을 알아준 것도 아마 기태가 아니였을까.

#3. 기태와 희준
이 영화의 중심 갈등은 기태와 희준에게 있다. 사실 기태와 희준은 서로 성향이 맞지 않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세심하고 감성적인 성격의 희준과는 반대로 기태는 강인하고 차갑다. 그래서 친구라고는 하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었다. 이러한 서열은 사실 어디서든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의 치부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는 그러한 서열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러한 서열은 쉽게 허물어진다. 세 친구 사이에 여자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 여자 한명 때문에 친구 사이가 다 깨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의 불씨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화재로 이어지는데 누구 하나 나서서 꺼뜨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모두 파국을 맞게 된 것이다.

#4. 기태와 아버지
기태의 아버지는 기태가 자살한 후 왜, 무엇이 그를 자살하게 만들었는지 추적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기태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며 과거를 쫓는 현재의 시점과 세 친구들의 만남과 갈등을 이야기하는 과거의 시점이 교차된다. 이러한 비극에는 아버지의 책임도 크다. 어머니가 없는 상황에서 기태가 감당해야 할 외로움과 공허함을 채워주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기태도 마찬가지다. 극중에서 희준은 기태의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온 기태의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아이들은 부모님이랑 함께 있을 때랑 친구들이랑 있을 때랑 다른 모습이라고. 이는 모든 부모들이 머리로는 알지만 자기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참 아이러니하다.
#5. 끝맺으며
마지막으로 다시 영화 제목 "파수꾼"의 의미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인간의 심리에 두 종류의 상처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 상처처럼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반화된 상처를 말하는 '스투디움(studium)'과 나머지 하나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고 해석할 수도 없어서 미리 예방하거나 대처할 수도 없고, 결론적으로 소통도 불가능한 상처인 '푼크툼(punctum)'이다.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기태가 느끼는 고통(상처)은 당연히 '푼크툼'이다. 실제로 기태는 왜 그러냐고 묻는 동윤의 말에 언어로서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답답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롤랑 바르트는 말했다. "내가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아프게 하지 못한다." 기태의 상처는 자신도 설명할 방법이 없고 그러므로 타인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아픔이다. 기태는 자기 내면에 자리잡은 그러한 아픔들을 경계하며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다른 상처(이는 눈에 보이는 폭력, 스투디움)를 주게 되었고, 결국 모든 것들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