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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비

이 세상은 핵분열과 그로 인한 연쇄 반응의 결과물 그게 전부다,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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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메테우스

 

영화 초반부에 프로메테우스가 소개되고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멈추며 오펜하이머가 등장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천상의 불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었으며,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산 속에 가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하는 무지막지한 형벌을 내린다. 이는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관통하는 은유로서 오펜하이머가 인간들에게 문명을 일깨워준 과학을 이용해 원자 폭탄이라는 멸망의 길을 열게 한 점, 미국 정치 세력을 등에 업고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었지만 훗날 그들의 먹잇감이 된 점 등은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케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이전까지 있었던 일들이 서로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듯한 장면 연출을 보여주며 끝맺는 것도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파멸의 연쇄 반응이 시작된 것 같아요.

 

#2. 핵분열과 핵융합(컬러와 흑백)

 

영화는 초반부터 챕터를 구분하여 보여준다. 1954년 원자력 협회에서 벌어진 오펜하이머 청문회를 중심으로 원자폭탄을 만들기까지의 과정들을 플래시백 형식으로 보여주는 컬러 파트와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의 인사청문회 과정인 흑백 파트로 말이다. 전자는 핵분열로, 후자는 핵융합으로 제목이 붙여졌는데 이는 과학원리를 영화의 플롯에 적용시킨 놀란 감독의 훌륭한 연출 기법이 되었다. 즉, 핵분열은 원자폭탄의 원리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된 오펜하이머의 이야기가 오펜하이머의 시각에서 전달되고 있으며, 핵융합은 수소폭탄의 원리로 이후 오펜하이머가 정치적 세력들에 낙인 찍혀 몰락하게 되는 과정을 루이스 스트로스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핵융합 반응을 촉진시키기 위한 매개로 고온(고열)의 환경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원자폭탄이 활용되므로 핵융합의 전제 조건으로 핵분열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영화 제목은 오펜하이머이지만 오펜하이머만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인물이 바로 스트로스다. 왜 굳이 두개의 챕터로 나눠서 이야기해야 했을까? 왜 오펜하이머의 입장에서 끝내지 않고 스트로스의 이야기까지 이어져야 했을까? 오펜하이머가 물리학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번뇌와 고민들은 결국 미국 정치에까지 연결되었으며, 그러한 인간적인 면모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조명함으로써 영화 오펜하이머가 결국 전기 영화로 끝나지 않고 드라마적 서사를 지닌 영화가 되었던 것 같다.

#3. 피카소와 T.S. 앨리엇 그리고 스트라빈스키

 

영화 속에서 오펜하이머가 피카소의 작품인 <팔짱을 낀 앉아있는 여성, 1937년 작>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뇌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릴 적 오펜하이머의 어머니가 야수파와 인상파의 그림을 많이 모았던 게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으며, 오펜하이머가 피카소의 형식을 깨는 실험주의적 예술 정신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겠다. 또한 피카소의 작품 중에 <게르니카, 1937년 작>라는 그림이 있는데 나치의 독일이 스페인 내전 당시 반란군인 국민파를 지원하면서 스페인의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실에 분노하며 독일과 국민파를 비난한 작품이다. 이는 훗날 정치 사상을 의심받는 또다른 갈등과 분열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또한 오펜하이머는 T.S.앨리엇의 시 <황무지>를 밤에 즐겨 읽으며 불안한 마음을 위로받기도 하는데, 1차 세계대전 후의 황폐한 유럽 상황을 상징적으로 그린 작품이기에 오펜하이머가 유럽에서 유학하던 1920년대 시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오펜하이머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즐겨 듣는 걸로 나오는데, <봄의 제전>과 원자폭탄은 기존의 물리학과 음악사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성질의 혁신과 혼란을 가져왔으며 탄생 후에 모두 충격적인 공포를 자아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4.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원자 폭탄 제작의 실현 가능성을 알렸으며, 오펜하이머는 실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원자 폭탄을 제작하는 총 책임자의 역할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양자역학 이론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비교적 젊은 세대들의 물리학자들은 그런 아인슈타인을 시대에 뒤떨어진 과학자로 치부하게 된다. 핵폭발이 일어나게 되면 연쇄반응으로 세상이 멸망하게 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며 트리니티 실험을 강행하게 되는 오펜하이머의 태도는 양자역학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마지막에 결국 핵폭탄의 위험성과 앞으로 펼쳐지게 될 연쇄 반응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과학자의 신념을 굳건히 하는 데 있어서 힘을 합치게 된다.

 

#5.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영화를 오펜하이머의 전기 영화 또는 원자 폭탄과 관련된 과학물리 영화로 보기보다 서사적 드라마 영화로 보는 이유가 바로 스트로스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대화로 촉발된 스트로스의 오해와 불안은 결국 챕터2 핵융합의 바탕이 되며, 물리학자가 아닌 경제행정가와의 갈등은 정치 역학의 이야기로 전환되어 오펜하이머의 이야기가 단순히 원자 폭탄을 만드는 과정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역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기록으로 다시 한번 조명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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