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결말을 알고도 한번 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삶의 끝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지나온 길들은 떠올릴 수 있지만 앞으로 나아갈 길이 어떨지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삶의 결말을 안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의미와 재미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주인공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 분)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덤덤하게 자신의 미래를 받아들인다. 간혹 그러한 주인공의 선택에 대해 딸과 남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결정이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영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는 그 주인공의 선택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직선으로 이미 그려진 시간 위에 각 사건들만이 존재할 뿐이며, 미래는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 주인공 이안(제레미 레너 분)의 마지막 대답이 이를 대변해준다.
평생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살았는데
요즘 제일 놀라운 건 그들(외계생명체)을 만난 게 아니고 당신을 만난 거예요
#2. 우리는 정해진 운명에 순응해야만 하는가
그럼 주인공 루이스 뱅크스처럼 인간은 시간 앞에서 무능력하고, 그저 정해진 닫힌 결말을 향해 묵묵히 걸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가 시간 앞에서 불행해지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그때 그것을 하지 않았더라면 또는 그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식의 후회와 무력감에서 비롯되는 불행들이다.
이 문제에 대해 영화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 시간의 순서에 연연해하지 말라고. 주인공은 자신에게 닥쳐올 아픔과 상처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함께 찾아오는 행복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따스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삶의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것들은 평생을 살아 숨쉬며 주인공이 지치고 쓰러질 때마다 행복했던 구원의 손길로 다시 일으켜 세워줄 것이다. 그래서 첫 장면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겐 처음과 끝이 별 의미가 없어.
#3. 윤회론적 세계관과 영화에서 드러난 복선들
도착은 또 다른 출발을 의미한다. 영화 자체가 처음과 끝이 똑같은 수미상관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를 잃은 미래의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결국 다시 아이를 잃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시간의 순서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히 혼란스러워질 수 밖에 없게 만든 감독의 연출이 훌륭했다고 본다. 또한 영화 속 헵타포드 문자(외계인들이 쓰던 문자)가 보여주는 순환을 뜻하는 구의 형태도 그렇고, 딸의 이름이 HANNAH(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똑같다)인 점도 모두 시간의 무한성, 순환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람쥐'라는 단어를 쓸 때 앞에서 뒤로 쓰는 순서가 있지만 그들에게는 순서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외계 생명체들은 결국 인간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에 얽매이지 않는 지혜를 전해주러 3,000년이나 먼 미래에서 왔던 것 같다.
#4. 죽음이나 이별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바람직한 모습
우리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의 모습들 중에 유일하게 알 수 있는 단 한가지. 바로 죽음과 이별이라는 필연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물론 힘들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의 수직선 위에서 본다면 삶의 힘든 지점이 또 다른 출발을 위한 새로운 지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그들은 내 옆에 없지만 내 기억 속에서 항상 살아 숨쉬며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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